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Diary

편지

뫼듀 2021. 8. 9. 09:16

어느새 몇 달이 지나버린 우리 부부의 결혼식.

섬세하고 꼼꼼한 아내의 성격답게 작은 소품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계획되어 있었다.

심지어 동생이 축가를 불러줄 때 내가 마지막 소절을 함께 부르는 것조차 아내의 계획이었을 정도...

 

하지만 단 하나, 내 편지만큼은 나의 서프라이즈였다.

서프라이즈를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뭔가 해주고 싶었지만, 예체능에는 영 재능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고민을 하다 진부하지만 솔직한 내용으로 편지를 썼다.

미리 뽑아놓으면 들킬 것 같아서 결혼식 당일에 친구에게 출력을 부탁하는 나름의 치밀함(?)도 있었다.

 

사실 편지를 쓸 때는 혹시 이상한 표현은 없는지 계속해서 다시 보느라 큰 울림은 없었다.

하지만 예식 당일 편지를 읽기 시작하며 환한 조명 아래에 선 아내를 바라보고 있으니 지난 5년여의 연애 기간과 코로나 사태로 인한 결혼식 연기 등 다사다난했던 결혼 준비 과정이 떠오르며 눈물이 차올랐다.

아내도 마찬가지의 느낌이었는지 펑펑 울기 시작했고, 나는 눈물이 꽉 찬 상태로 겨우 끝까지 읽어내릴 수 있었다.

 

이제 이 편지에 써놓은 약속 잘 지키며 함께 부지런히 행복해야지 ♥

 


사랑하는 ○○공주님

우리가 드디어 코로나로 인해 미루고 미루던 결혼식을 하게 되었네.

 

20XX년에 약혼을 하고나서 XX년부터 결혼을 준비하면서 참 우여곡절이 많았었는데,

지금 이렇게 OO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 눈 앞에 서있는 걸 보니 꿈을 꾸는 것 같다.

 

결혼식을 준비하면서 ○○는 춤을 준비하고 내게 축가 노래도 한 소절 부르게 했지.

 

하지만 음치 몸치 박치 삼박자를 고루 갖춘 내가, 내 아내가 된 ○○에게 결혼식이라는 자리에서

나의 새신랑으로써의 진심어린 마음과 각오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

진부하지만 편지가 가장 나다운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편지를 써.

 

왜 사람들이 결혼할 때면 흔히 하는 말이 있잖아.

“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주겠다.”

“아름다운 눈망울에 이슬 맺히게 하지 않겠다.” 는 등…

나는 이런 틀에 박힌 말은 하지 않을게.

○○는 외출 후 손씻기는 귀찮아해도 내가 하는 설거지가 답답해서 손에 물을 묻히는 여장부이기도 하고,

감동적인 영화같은 걸 보면서 눈물 흘리는 걸 즐기는 소녀기도 하니까.

 

대신,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게.

 

먼저, 자상한 남편이 될게.

지금까지 연애를 하면서 양가 부모님과 친구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자상한 남자친구라고 칭찬해왔어.

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다 알거야. 내가 그렇게 자상한 스타일이 아니라는 걸. 그리고 나를 그렇게 만든 건 100% ○○가 날 세심하게 코치해준 덕분이라는 걸 말야.

그리고 내 추측이지만 ○○는 그런 모습들이 내 자발적인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아쉬웠던 부분도 있었을 것 같아.

앞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모습이 아니라 진정으로 ○○에게 자상하고 ○○를 사랑하는 남편이 될게.

 

두번째로, 부끄럽지 않은 남편이 될게.

우리가 긴 기간 연애를 하면서, 행복한 시간이 물론 절대적으로 많았지만, 서로 다툰 적도 꽤 있잖아?

서로 다른 생각과 경험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하고 함께 해도 평생 다툼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.

하지만 적어도 그런 과정에서 후회할 만한 부끄러운 일이 없고,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음을 줄 수 있는 남편이 될게.

무슨 말인지 알지?

 

마지막으로 항상 ○○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남편이 될게.

우리는 이제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한 서로의 모습을 봐도 웃으며 깔깔대는 연인이고 부부가 됐어.

하지만 ○○는 가끔 연애 초의 설렘을 추억할 때가 있잖아.

내가 이미 배는 좀 많이 나왔지만, 앞으로 건강관리와 자기계발을 게을리 하지 않고

중년 노년이 되서도 사랑받을 수 있는 멋진 남자가 될게.

 

사랑하는 ○○공주님

이 말은 내가 연애 때 항상 ○○에게 손편지를 쓸때마다 편지를 시작하던 말이었지.

이제는 업그레이드할 순간이 된 것 같아.

 

이렇게 못난 나를 멋진 남자로 남편으로 만들어줘서 정말 고마워.

이 고마운 마음은 평생 ○○를 여왕님처럼 아껴주며 갚아나갈게!!

 

나와 결혼해줘서 정말 고맙고 사랑해.

 

우리 잘 살아보자

 

추신. ○○는 오글거리는 말 싫어하는데 끝까지 들어주느라 고생했어!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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